한국 중고등학교 역사교과서의 러시아 관련 내용 분석

(2004, 세계사를 중심으로)

따찌아나 씸비즈쩨바, PH.D. (Korean Historiography)

러시아 교육자와 한국학 학자들은 러시아교과서와 관련되고 교육개발원과 정신문화연구원이 발간한 논문을 깊이 연구했습니다. 그연구 결과는 «미래를 위한 협조인가, 과거에 대한 복수인가»라는 «원탁토론회» 제목하에2004 «러시아 한국학» 지에서 츨판되었습니다. 우리는 «러시아한국학»지를 교육 개발원과 정신문화 연구원 으로 보냈으므로 아마도 여러분이 내용을 대충 아실 것입니다. 아쉬운 일이지만, 그때무터 1년반이나 지났으나 우리는 한국측에서 아무 대응도 받지 못했습니다. 교류와 의견교환이 필요하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나는2004 3판으로 나온 한국교과서 «세계사 (고등학교[1] 분석해 보았습니다. 2002 7 한국 교육인적자원부는 이교과서를 검정했습니다. 역사가로써, 러시아인으로써 인상을 나누어 드리겠습니다.

«세계사» 모자이크식으로 지은 책이다. 나라 별로 조리가 있는 이야기가 아니가 여러 사실과 날짜를 대충 소개합니다. 필자의 기본 목적은 인류가 최대한 가치관을 향하여 걸어온 길을 보여 주는데 있습니다.

미국식 민주는 최고 가치관. 교과서 필자에 (앞으로 '필자' – T.S. ) 따르면, 기본 가치관은 자본주의와 미국식 민줍니다. «미국과 러시아»주제를 예로 보면 (pp. 214–215), 19세기 전반기의 미국이 ‘민주주의가 뿌리를 내린 나라였다’ 쓰입니다. 하지만, 노예 제도가 있던 당시 미국은 민주 나라가 아니었다는 것은 명백합니다. 노예제를 반대하는 세력이 있어서 그것은 민주의 싹이라고 있습니다. 러시아에도 농노제를 없애버려는 세력이 있었습니다. 필자가 언명하는 데카브리스트 나로드니키는 바로 그것입니다. 양국에서 같은 성격을 갖는 민주세력이 있으면서도 교과서는 미국에 대해서 ‘민주주의가 뿌리를 내린 나라였다’ 주장합니다. 19세기 러시아와 미국간 특별한 관계가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교과서 필자는 양국을 합하고 «미국과 러시아»주제를 입력합니까? 미국의 '빠른 속도의 발전' '러시아의 '후진성' 대비하기 위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냉정 시기' 냄새가 나고 약점이 많은 대비다. 주제의 마지막 문장은 «러시아의 남하 정책은 다시 좌절되었다» 하는 말입니다. 대표적인 주장입니다.

19세기 미국이 북미 대륙에서 영토 팽창을 했다고 쓰면서 필자는 새로 들어온 백인종 식민주의자들이 그영토에 엣날부터 사는 인디안인을 조상의 땅에서 쫓아냈다는 것을 언급하지 않고 본토인의 고생이야말로 미국 자본주의 경제의 빠른 발전의 토대였다는 것을 묵살합니다.

친미 지향성. P. 81. « 년의 인물 '칭기즈 '»: «1995 12, 미국의 워싱턴 포스트지는 지난 천년 동안 인류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로 칭기즈 칸을 꼽았다. 선정 이유를 밝히면서 '칭기즈 ' 사람과 과학의 교류를 통해 지구를 좁게 만들고, «오늘 날의 정보 통신 혁명에 비견될 만한 정보-교통-통신의 혁명을 가져온 인물»이라고 쓰입니다. 당시 몽고족은 그들이 점령한 민족보다 후진적이었습니. 1223년에 루시 (당시 러시아 이름) 침투한 몽고족 무리는 우리 나라 인구의 상당한 부분을 살육시키고, 문화적 유산을 불태워서 없애버림으로써 러시아를 과거 200년전으로 내던졌습니다. 칭기즈 칸을 진보를 가져온 '혁명가'라고 부르는 이유는 명백치 않습니다. 또는, 칭기즈 칸이 살던 시기에는 미국이 존재하지도 않았고 미국 신문의 평가는 역사공부의 태도가 없다고 생각됩니다.

러시아 독립운동사 무시. 13세기 몽고 침략과 기반을 반대한 루시 해방투쟁은 언급되지는 않는다.

P. 208. 필자는 나폴레옹의 러시아 침투 이유를 영토 침략을 하기 위해서 것이 아니라 '러시아가 대륙 봉쇄령을 무시했다' 설명합니다. 이렇게 보면, 나폴레옹은 침략을 위한 근거가 있던 같습니다. 계속해서 필자는 «나폴레옹은 러시아의 소개 작전으로 소득없이 돌아서야 했다» 씁니다. 실상 당시는 나폴레옹은 자기 대군을 완전히 잃고 자신의 목숨을 구원하면서 겨우 도망갔다고 하면 옳을 것입니다. 1812년에 농노부터 귀족까지 러시아 인구는 한결같이 해방전쟁으로 일어났고 곳곳마다 침략자들을 없애버렸기 때문입니다. 한국 교과서에는 광범위한 해방전쟁에 대한 언급이 없습니다.

P. 276-277. 1941-1945년간 히틀러 침략을 반대하여 싸워 3000만명을 잃은 소련의 위대한 조국전쟁은 언급되지는 않고 소련에 대한 부분은 3-4줄밖에 안됩니다. 소련이 1941 6월부터 전쟁에서 싸웠고 미국과 영국 동맹국들이 3 지나, 1944 6 6일에만 전쟁에 들어섰습니다. 유럽지역 전쟁에서 바로 소련은 기본 역할을 했고 희생자가 가장 많았지만 필자는 '소련이 영국과 상호원조 조약을 맺어 완강히 저항했다' 지적하면서 영국도 저항에서 역할을 했다는 것을 보이도록 노력합니다. 사실에 어긋나는 주장입니다. 동맹국은 히틀러가 소련을 파멸할 것을 기대하면서 인부로 2 전선을 오래 동안 세우지 않았다는 것은 사실입니다. [ 문제가 러시아를 위해 상당히 의미를 갖고 있으므로 러시아의 입장을 소개하는 'Korea Times'지에 실린볼코프박사의 참고로 첨부합니다].

‘러시아는 패배만 당한다’ ‘종이 호라이’ (19새기 일본 역사학에서 나온 논거). P. 215. ‘농노 해방은 대단히 획기적인 조치였다’ 인정하면서 필자는 조치의 의미를 과소평가합니다. 1861 러시아 농노 해방의 주요 의미는 ‘가난한 농민이 자유 농이 되기란 사실상 불가능하였다’기가 아니라 ‘자본주의 발전을 위한 조건을 마련 했다’는데 있습니다.

P. 259. ‘상트페테르주르크가 거친 파도와 혹독한 추위로 황량하기 짝이 없는 곳에 건설된 도시였지만, 표트르 대제는 이곳이야말로 세계를 향하여 뻗어나갈 ‘서방으로의 ’이라고 여겼다. — 표트르가 여겼다는 것이 아니라 도시는 정말 ‘서방으로의 ’, 다른 말로 하자면 해외 무역을 하는 항구가 되었습니다. 북쪽 유럽의 가장 아름다운 도시 하나는 상트페체르부르크 항구는200 이상 동앙 러시아 수도였다. ‘황량하기 짝이 없는 ’에는500만명의 사람이 삽니다.

러시아 관련 정보를 의도적으로 묵살하는 . P. 319. «우주 시대의 개막» 부분에서 1961 4 11 세계 역사상 최초로 우주로 유리 가가린에 대한 언급이 없습니다.

P. 227. '청조는 톈진조약과 베이징 조약을 맺어 추가로 항구를 개항하고 외교관의 베이징 주재를 허용하였다. 러시아는 사건을 조정해준 대가로 연해주를 얻었다'. — 여기서는 중요한 정보가 빠졌다고 생각됩니다. 당시 (1860) 러시아도 청조와의 베이징 조약을 맺었습니다. 조약에 따라서 러시아와 조선이 이웃국가가 되었습니다. 국경이 생기자마다 러시아 연해주와 함경도간의 무욕이 발생했고 1864년부터 함경도 농민이 러시아로 이민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민이 계속 늘어났고 1917년에 러시아에 사는 조선이민자의 수는 10만명에 이르렀습니다. 한국학생이 읽는 교과서에서 이같은 정보가 필요하다고 생각됩니다.

러시아 문화가 추체성이 없다. P. 135. «키에프 건국을 노르만 족이 세웠다», «러시아가 비잔티움 문화를 적극적으로 받았다», 러시아 건축물은 «로마 기술과 동방의 돔형 건축 조합한 것이 특징이란다». 러시아 정교는 '그리스 정교'였다.

명백치 않은 내용. P. 135. ‘러시아, 그리스 정교회의 맏형으로’라는 제목하에 실린 내용은 제목을 설명하지 않습니다. 모스크바는 번째 로마이기도 하고 2 콘스탄티노플이라기도 불리웁니다. 비잔치움 제국에서 흡수된 러시아 정교는 ‘그리스 정교’였다고 쓰입니다. 러시아 ‘교회는 사회적 역할보다 개인의 수행을 최고의 미덕으로 여긴다’라는 주장은 러시아 정교회가 수백년 동안 정치사회 생활에서 상당한 역할을 것을 설멍하지 않습니다. 정교회와 관련된 모든 언급을 재검토해야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사실에 어긋나는 . P. 135. '15세기경부터 모스크바가 교역의 중심지로 발달하면서 모스크바 대공국의 힘이 커졌다'. — 모스크바 대공국의 힘이 커지는 이유는 교역이 아니라 몽고기반을 반대한 투쟁에서 인민을 단결시켜 이끄는데 있었습니다.

P. 192. 표트르 대제는 스웨덴과의 전쟁에서 이겨 상트 페테르주르크를 건설했다. —스웨덴과의 전쟁 아니라 초기인 1702년이였다.

P. 135, 192. ‘차르’= ‘황제’. — 15세기까지 러시아 군주는 ‘’이라고 불렀습니다. 15-17 세기 — 차르. 1721년부터 황제라고 부릅니다. 변함은 국가발전의 여러 단계를 의미 합니다.

P. 259. '표트르 대제에게 부동항이 무엇보다 중요하였다'. — 부동항이 아니라 해외로 나가기 위한 항구가 필요했습니다. 표트르는 발트 연안에 상트페테르부르크를 건설하고 오스만 제국과의 전쟁에서 이겨 흑해에서도 아조프항구를 창립하므로써 항구를 얻는데 성공했다고 있습니다.

잘못된 그림. P. 135. ‘러시아의 크레믈린 궁전’. — 그림은 궁전이 아니라 성벽뒤 보이는 모스크바 크레믈린의 성당광장입니다. 모스크바 크레믈린 궁전은 그림에서 보이지 않습니다. ‘러시아 크레믈린”이란 잘못 말입니다. ‘크레믈린’이란 성병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크레믈린은 모든 러시아의 도시에 있습니다. 노브도로드시 크레믈린, 스몰렌스크시 크레믈린, 프스코프시 크레믈린, 야로슬라블시 크레믈린, 로스토프시 크레믈린, 니주늬 노부고로드시 크레믈린, 카잔시 크레믈린 등등.

P. 192. ‘표트르 대제가 조선공으로 일할 당시의 모습’. — 교과서에 실린 면도하지 않는 노동자 아저씨의 그림은 풍자적인 이미지에 불과합니다. 표트르의 실제적인 모습과 아무 공통점도 없습니다. 표트르의 수많은 조상화 중에 같은 선택은 의도적인 것입니다. [서양 미술가 G. Kneller1698년에 그린 표트르 대제의 첨부된 조상화를 참고로 보시기 바랍니다].

P. 192. ‘귀족의 수염을 자르는 이발사’라는 만화. — 표트르 대제가 실시한 대개혁의 의미를 낮추는 그림. 가보년 단발령과 비슷한 개혁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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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 내용은 첫눈에 띄는 문제점입니다. 완벽한 분석을 하자면 수많은 교육자, 러시아사와 문화 전문가, 한국학 학자들의 노력이 필요합니다. 사정에 의해서 이상의 자료를 정신문화연구원에서 여러분들에게 직접 소개하지 못해서 아쉬운 일입니다.

Simbirtseva Tatiana, “Korean Studies in Russia”, almanac,

 Editing Board Secreta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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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오금성, 유경준, 임화영, 강문환, 정연 . 세계사. 고등학교. — 서울: 금성출판사, 2004. 교육인적자원부 검정. 2002.7.30.